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문단 편집) === 돈으로 황제를 사다 === 콤모두스 암살 후 자신들이 추대한 황제 페르티낙스를 죽인 근위대장 [[퀸투스 아이밀리우스 라이투스]](레토)와 휘하 병사들은 로마 시민들의 반응이 두려워 페르티낙스의 머리를 장대에 높이 매단 채 진지로 돌아와 병영의 문을 걸어 닫았다. 사실 콤모두스 암살 당시, 로마에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피를 물려받은 이들이 소수나마 있긴 했다. 원로원에는 콤모두스의 매형들인 [[폼페이아누스|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가 복귀한 상태였고,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장녀 루킬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 폼페이아누스도 있었다. 또 콤모두스의 매형 중 루키우스 베루스의 친조카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라는 원로원 의원도 있었다. 그는 전직집정관이었고 양심적이고 고결한 명문가 출신 귀족이었으며, 혈통적으로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피를 이어받았다. 왜냐하면 이 사람의 어머니는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장녀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옛 약혼녀였고, 아내는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차녀 파딜라였기 때문이다. 또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손윗동서 폼페이아누스처럼 겸손한 인품과 매우 양심적이고 헌신적 태도로 생전의 마르쿠스 황제에게 여러 사위 중 상당한 총애를 받았다. 하지만 이 세 사람 모두 콤모두스 암살 당시 페르티낙스와 달리 적극적으로 제위를 원하지 않았으며, 망가진 국가 시스템과 정국안정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또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아내의 동생 콤모두스 생전부터 권력욕이 강한 사람도 아니었고[* 루킬라가 콤모두스를 암살하기 위해 여동생 부부들과 공모해 [[콜로세움]]에서 암살을 시도할 당시에도 개입하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던 폼페이아누스 역시 페르티낙스 이후의 다음 황제를 결정할 열쇠를 쥐지 못했다. 그 이유는 '''새 황제와 관련된 결정권을 쥔 실세는 다름 아닌 [[프라이토리아니]] 병사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과는 막장으로 치닫게 될 수밖에 없었고, 이것은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괴상하고 수치스러운 사건이 일어나게 된 계기였다. 이를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새 황제를 정하는 일은 한 명이 아닌 두 명의 황제 후보자가 원로원 회의장도 아닌, 근위대 진지에 나타나 '''일종의 [[경매]] 방식'''을 통해 군사들의 지지를 얻는 대가로 '''입찰'''하는 절차가 진행되었다. '''더 웃긴 것은 이때 근위대는 이를 굳이 숨기지 않은 채 제위 경매에 관한 공고문을 벽에 붙여 놓았다.''' 따라서 네르바-안토니누스 가문의 사위들인 폼페이아누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이런 행태에 혀를 내둘렀고 개탄해 마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원로원 의원들도 건국 이래 개판으로 흘러가는 상황에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제위를 원한 이들은 있었고 경쟁은 치열했다. 따라서 최종적으로는 두 명의 경쟁 후보가 남게 됐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는 [[페르티낙스]]의 장인인 티투스 플라비우스 술피키아누스[* 그리스 [[크레타 섬]] 태생으로 사위 페르티낙스보다 10살 정도 어렸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에게는 용서를 받아 지위를 유지했지만, 율리아누스 몰락 직후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지지했다. 따라서 뒤에 등장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명에 따라, 197년 기소된 뒤 반역 혐의로 처형됐다.]였고, 두 번째 후보는 유력한 전직 집정관이자 상당한 재력가로 널리 알려진 마르쿠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그리고 경매방식으로 의논된 새황제 최종후보는 결국 군인들에게 막대한 보너스를 약속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로 선택했다. 그런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행동은 디오 카시우스의 당시 현장 목격담에 따르면, 매우 비양심적이고 저급했다고 한다. 또 그는 상대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만약 술피키아누스를 뽑는다면 자기 손으로 페르티낙스 모살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고 그들에게 경고했다고 한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에 오른 것은 순전히 근위대의 지지 때문이었고 이러한 취약한 입지와 페르티낙스의 급작스러운 죽음을 알고 있던 그는 그가 말한 대로 "운명에 대한 불안감으로 첫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뜬 눈으로 지샜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근위대에게 했던 무절제한 선심성 공약을 모두 지키지 못한 것이 컸다[* 그래도 막대한 자산을 가진 부자였고, 돈으로 제위를 산 만큼, 막대한 보너스는 예정대로 지급했다.]. 또 막장군주 콤모두스에게 부패혐의로 기소돼 두 번이나 처벌받을 뻔한 탓에, 율리아누스는 무죄로 방면되었음에도, 정치적 내상이 상당했다. 그래서 그는 세간의 존경은 기대하기 힘든 인사로 추락했는데, 돈으로 제위를 샀다는 이야기가 퍼지자 로마 시민들에게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원로원에게도 그 평가가 안좋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율리아누스는 경쟁자 술피키아누스에게 어떠한 정치적 보복도 하지 않았고, 페르티낙스와 달리 무리하게 콤모두스 시대와의 절연을 외치며 로마 전체를 혼란으로 몰고 가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티낙스의 죽음과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즉위과정, 사회 분위기는 야심있고 능력있는 속주 총독과 군사령관들에게 좋은 기회가 됐다. 따라서 국경 지역 주둔군을 휘하에 거느린 3명의 경쟁자 간의 제위 쟁탈전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로 시리아의 총독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 총독이 4월 중순에 시리아의 4개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받고 안티오키아를 임시수도로 선포하여 스스로 황제라고 자처했다. 이후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도 황제를 자처했다. 그러나 좀 더 강력한 후보자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냉혹하고 영리한 정치가인 그는, 니게르가 먼저 황제를 참칭한 것을 알아챈 이후 가장 적절한 시점을 정해 16개 군단을 비롯한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주둔군 전체의 지지를 얻어낸 다음 황제를 자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